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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의정부시 아이사랑 수필공모전 입선, 김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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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2022-09-29 17:29:04
보랏빛 추억



 

 

매해 봄 용현동은 보랏빛으로 물든다. 아무리 봄의 여왕은 벚꽃이라 한들, 내게 있어 벚꽃은 그저 엑스트라에 불과할 뿐.

아직 옷깃 안으로 스며오는 바람이 찬 4. 바람은 무채색만이 가득하던 정원에 강렬한 색채를 뽐내는 꽃들을 시기하듯 매섭게 불어댔다.

꽃들이 참으로 흐드러지게 피었구나. 가디건의 옷깃을 여민 채 벚꽃을 지나친다. 영산홍과 철쭉, 진달래 목련까지 지나쳐 곤제근린공원 근처에 자리 잡은 라일락 앞에 멈춰 선다. 철없이 어리던 난 몰래 라일락 향을 한아름 꺾어 우리 집으로 향하곤 했다.

연례행사처럼 수년을 반복 해오던 행동들이었으나 외출이 꺼려진 뒤부터는 차마 공원에 가득한 보랏빛을 만나기 여간 어려웠다.

그저 멍하니 어항 속을 바라보며 허한 속을 달랬다. 나의 작은 어항 속 푸른 물고기의 이름도 라일라. 라일라가 풍성한 지느러미로 내게 말한다. ‘어서 나가봐.’ 라일라의 플레어링에 난 다시 가디건을 챙겨 입은 채 옷깃을 여미며 곤제 공원으로 향한다.

작은 라일락 나무 앞 벤치에 앉아 책장을 넘겨본다. 열두 번은 더 읽어 본 듯한 공지영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주인공이 너무 답답하다니까- 생각하며 잠시 숨을 고르자 kf94 마스크의 3중 필터 속으로 스며온 라일락 향기. 왜인지 모를 애틋함이 가득 밀려온다.

다시 한 번 폐가 시릴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켜 본다. 때마침 에어팟에서 흘러나온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방금 내가 읽던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상황이었다. 이 소설같이 아름다운 상황에 나 홀로 있는 것이 처량하기도 했다. 노래의 첫 소절에 심금이 울린다. ‘라일락 꽃 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그렇다. 사실 내가 라일락에 이토록 집착하게 된 계기도 어릴 적 잊을 수 없는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라일락과 관련된 나의 가장 낡은 기억을 찾아내자면, 아마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봄일 것이다. 꽃들을 시기하는 차가운 바람과 대비되는 따사로운 볕으로 적당히 덥혀진 공기에 꽃향기가 가득 퍼지던, 노란 나비가 꽃향기를 좇던 그런 봄이었다.

우리 집 근처 부용산에서 쑥 캐기에 여념 없는 할머니의 등 뒤 바위에 걸터앉아 네잎클로버를 찾던 난 연신 하품을 반복했다. 온 몸으로 지루함을 표출하던 와중, 따듯한 바람 사이로 스쳐 지나간 보랏빛 향기가 내 코끝을 간질였다.

그 향기의 근원을 찾기 위해 나는 고개를 하늘로 젖혀든 채 한참을 뛰어다녔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향기에 종착지에 다다랐다. 어릴 적 나는 꽃이란 화려하고 아름다운 강렬한 색채를 지닌 것들의 총체라고 생각해왔다.

아마 이 순간만큼은 나의 고정관념이 산산이 부서졌던 첫 순간이었을 것이다. 은은한 연보랏빛의 수많은 꽃송이들은 강렬한 원색의 꽃들을 비웃듯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처음 마주한 보랏빛 꽃송이에 완전히 매료된 난 발끝을 세워 더 가까이 향을 맡기 위해 애썼다.

인고의 까치발 끝에 간신히 닿은 작은 꽃송이 하나. 그 한 떨기 라일락에 얼굴을 파묻어 온 세포들을 그 보랏빛에 집중시켰다. 당시의 그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던 그 향기는 감히 문장으로 형용해낼 수 없을 것이다. 여섯 살의 어린 난 그 향기를 형용하기 어려워 맛으로 표현하고자 꽃을 입에 넣어 씹어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보랏빛에 빠져있기에 여념 없는 나의 뒤로 급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할머니였다. 흙으로 범벅이 되어있는 손으로 당신의 눈물을 닦아내며 내게 다가오셨다. 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 말 없이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죄책이었을 것이다. “네가 없어지면 할미는 못 살아.” 안도의 한숨을 쉬는 할머니를 보며 미안한 마음에 난 울음을 터뜨렸다. 수도꼭지라도 틀었는지 좀처럼 멈출 줄 모르는 내 눈물에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보랏빛 손수건을 꺼내 내 뺨을 닦아주셨다.

할머니는 라일락 한 떨기를 왼 손에 쥔 채 흐느끼는 나를 들어 안아주신 채 이 꽃이 뭔지 알간하고 물으셨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에 할머니는 이 꽃은 라일락이라 하는디, 할미는 이 꽃이 제일루 좋다!”

이 말을 들은 지 약 20년이 되었지만, 이 문장만큼은 어제 들은 듯 생생하게 기억난다. 우리 할머니께선 늘 당신이 좋아는 것에 대해서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분이셨다. 좋아하는 과일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노래는 무엇인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수도 없이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우리 가은이가 좋아하는 게 할미가 좋아하는 거지.’였다.

그런 할머니가 라일락을 좋아한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딸꾹질을 하는 내 등을 토닥이며 대답했다. “라일락의 꽃말은 젊은 날의 추억이랴. 할미도 젊은 날들이 있었거든.” 할머니의 젊은 시절 이야기는 마치 오래된 옛날 영화 필름을 재생해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즈넉하면서도 애틋한, 혹은 뭉클한.

할머니는 어머니에 대한, 그러니까 나의 증조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자주 상기시키곤 했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낭창낭창한 걸음걸이로 집 앞 정원을 자주 걸으셨다고 했다. 어린 할머니의 손을 잡고 이 꽃은 진달래, 이 꽃은 제비꽃, 이 꽃은 영산홍, 이 꽃은 모란. 하시며 하나하나 다 일러주시곤 했단다.

그 중 증조모께서 가장 좋아하시던 꽃이 바로 라일락이었는데, 정원의 담장을 전부 라일락으로 장식 해두실 정도로 라일락을 좋아하셨다고 한다. 하여 매 해 봄이면 담장에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을 두고 어머니와 함께 소묘를 하는 시간을 보내며 라일락에 대한 애정을 쌓아온 것이다.

하지만 늘 낭창낭창하실 것만 같던 증조모께서 겨우내 지병을 앓으며 하시던 말씀은, 라일락을 보고 돌아가시고 싶다는 말씀이었단다. 결국 라일락을 보지 못 하고 떠나셨다고 했는데, 난 그 때 할머니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아까 내 눈물을 닦았던 보랏빛 손수건으로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준다. 나의 첫 라일락은 보랏빛 추억으로 물들어갔다.

수십 번의 라일락이 피고 졌다. 15년 전의 라일락은 그 때 그 자리 그대로였으나, 애석하게도 소중한 것들은 금세 시들어버리기 마련이다. 수십 년이 흐르며 시드는 것은 라일락뿐만이 아니었다. 심장이 약한 집안 내력으로 할머니께서 거동하기 어려워지셨다.

요양 병원에 입원하시고 난 뒤로 라일락이 벌써 여섯 번이나 피고 졌다. 의자에 걸터앉아 가만히 할머니 얼굴을 들여다본다. “할머니, 올해도 라일락 폈네-” 하며 화단에서 따온 라일락을 툭 건넨다. 반가운 기색 없이 도로 가져다 놓으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돌아가는겨. 각자 있어야 할 제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 있어야 가장 예쁜 거란다, 그러니 할미 죽고 나면 산소 옆에 작은 라일락 묘목 하나 심어두어. 알갔지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최근 증상이 악화되며 당신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자주 꺼내시기 때문이다. 속상한 마음에 나는 또 맘에 안 들면 내다 버리쇼.” 퉁명스레 말하며 병실을 빠져 나간다.

돌이켜보니 그렇다. 우리 할머니는 늘 모든 것들은 제자리에 있어야 가장 아름다운 법이라고 말씀하시며 사라지는 꽃향기에 아쉬워하던 분이셨다. 그렇게 당신이 좋아하시는 라일락을 절대 꺾어서 집에 가져가는 법이 없었던 울 할머니. 내가 커버린 뒤부터는 내가 하는 말들이 너무 현학적이라며 힘 좀 빼라고 하시던 울 할머니. 연이은 입시에 실패해 홀로 흐느끼던 내게, 볕이 들면 다시 라일락이 필거라고 말씀하시던 울 할머니.

부주의한 내가 혹여나 다치진 않을까 우리학교 근처에서 늘 서성이시던 울 할머니. 내가 목감기에 걸린 날이면 밤새 배를 삶아 입에 떠먹여 주시던 울 할머니. 내가 교복 입는 모습까지 만이라도 보고 가고 싶다 하신 울 할머니. 이젠 웨딩드레스 입는 모습까지 봐줬으면 좋겠는데. 왜 자꾸만 입 밖으로 감정 표현이 안 되는 건지. 그 어느 순간보다 가장 슬픈 순간은, 내게 추억을 만들어준 이가 추억이 되었을 때다.

의정부의 모든 곳은 나의 할머니의 추억으로 채워진 보랏빛이, 그 보랏빛과 함께 빛나는 꽃들의 색채들이 가득하다. 의정부의 시화인 진한 분홍과 빨간색의 철쭉이 피어있는 민락동 곤제공원, 딸기우윳빛의 겹벚꽃이 만개한 부용천, 오색 빛 튤립이 잔뜩 심어져 있는 의정부역 공원, 가슴 벅차게 아름다운 새빨간 빛의 장미가 가득한 신곡동. 그리고 나의 모든 추억이 담긴 용현동의 라일락.

나의 소중한 라일락이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이 되기 전에 40개월 난 나의 조카 손을 붙잡고 연습해본다. “율아 이 꽃은 라일락인데, 고모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야.”

라일락의 또 다른 꽃말은 첫사랑이다. 내게 있어 처음으로 사랑을 넘치도록 가득 부어 준 우리 친할머니, 정해연 여사께 이 글을 바치며 마무리한다.

난 여전히 라일락 향이 가득한 용현동에서 보랏빛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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